ZOOM
< 74년의 발자취 > 호남 민중의 교육열망을 담은 출발의 역사
총관리자
2020-10-29
812
[조선대학교 74년의 발자취]
호남 민중의 교육 열망을 담은 출발의 역사
수세기 동안 호남 민중의 교육적 열망은 어느 지역보다 절실했으며, ‘호남민립대학 설립 운동’이 지속적으로 펼쳐졌습니다.
해방 후 그 결실을 보게 된 것이 바로 ‘조선대학 설립동지회’의 결성과 ‘조선대학교’의 설립입니다.
1946년 5월 16일, 조선대학 설립동지회 설립준비위원회 결성을 시작으로, 6월 29일 준비위원 11명 선출,
8월 설립동지회 발족에 이어 9월 29일에 4개 학부 12학과 1,194명을 정원으로 하는 ‘광주야간대학원’이 개원됩니다.
이 광주야간대학원은 같은 해 11월, 지역성을 초월한 교육적 큰 뜻을 담은 ‘조선대학원’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
조선대학 설립동지회 권유문
설립동지회 권유문을 통한 설립에 7만 2천 명의 민중 참여
조선대학 설립동지회는 조선대학원을 개교한 후, 12월에 조선대학 설립동지회 권유문을 발표하고 본격적인 회원 모집과 모금 활동에 들어갑니다.
조선대학 설립동지회 권유문은 1946년 12월에 설립동지회 집행부위원장이었던 한규종이
1923년의 ‘조선민립대학 설립 발기문’을 참고하여 초안을 만들고, 수차례의 수정 보완 작업을 거쳐 완성된 것으로
현재 조선대학교 역사관에 원본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설립동지회의 회원 자격은 ‘본 회의 목적에 찬성하며 본 회의 이상을 달성하기 위해
성실히 진력하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매년 백 원(당시 쌀 한 말 가격)의 회비를 납부하는 자’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때 건축 자재와 임야, 땅 등을 기증해 주신 분도 있었고, 기증회비를 낼 형편이 못 되는 분들은 쌀, 참깨, 장작, 김, 미역과 같은 정성을 보태기도 했습니다.
모금 활동 결과, 1947년 12월에 총 7만 2천여 명의 회원이 확보되고 1억 2천여만 원의 유지 재단을 확립하여
1948년 5월 26일 ‘재단법인 조선대학’의 설립을 허가받았습니다.
이후 1953년 3월, 종합대학교로 승격되었고 ‘조선대학교’라는 이름으로 3개 대학(문리·법정·공과대학)과 대학원이 설치됐습니다.
화가 김보현 시인 김현승
화가 오지호 인권변호사 이돈명
유명 석학들이 기반을 다진 호남 명문 사학으로의 출발
대학 설립 후 교원이 부족하자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석학들이 무보수 강의를 자청했습니다.
광주지방법원 김쌍봉 부장 판사 등 지역 법조계 인사들과 광주사범학교·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민족주의 인사들이 참여했으며, 이한기 전 국무총리 서리는 전국에서 최초로 조선대학에서 국제법을 강의했습니다.
또한 시인 김기림, 김현승, 화가 김보현, 천경자 등이 인재 양성을 위해 먼 거리를 마다않고 달려왔습니다.
조선대학교 교가를 작사한 시인 김기림
민족의 기개 서린 교가
조선대학교의 학생이자 설립동지회원들이었던 그들은 전남도청에서 제공한 트럭을 나눠 타고
호남 각지로 모금활동을 나가면서 ‘조선대학 건설가’를 불렀습니다.
그동안 남아 있지 않다고 알려졌던 이 ‘건설가’는 2011년 5월 박물관의 개교 65주년 기념 학교사 특별전을 계기로
음악교육과 김혜경 교수가 보관하고 있던 건설가 악보 수록 노트를 기증 받음으로써 비로소 알려졌습니다.
건설가와는 별개로 정식 교가가 필요해지자 시인 김기림 교수에게 교가 가사를 부탁합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시인인 김기림 교수는 학교 뒷산 깃대봉에 앉아 광주 시가지와 당시 한창이던
본관 건립 현장을 바라보면서 직접 받은 느낌을 담아 교가를 작사했습니다.
“막는것 산이거든 무느곤 못가랴 파도건 눈보라건 박차헤치자.”
조선대학교 교가에는 미래를 열어갈 인재 양성을 꿈꾸던 국민의
희망찬 목소리와 시대적 요구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1.8항쟁 모습
1.8항쟁기념비
설립사 왜곡에 맞서 지켜낸 민립 가치와 자주적 교육 공동체
1.8항쟁은 1987년 5월, 독재 체제로 조선대학교의 설립역사를 왜곡하고
대학의 재정으로 사익을 취하던 박철웅 전총장과 그 일가였던 구 이사진의 퇴진을 요구한 학원민주화 투쟁입니다.
1980년 민주화의 봄을 계기로 군부독재 타도운동 및 사회민주화운동과 맞물려 학원자율화운동이 일어났습니다.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하고 교수들은 양심선언을 하며 항쟁을 이어갔습니다.
1988년 1월 8일은 공권력 투입으로 113일간의 장기 농성이 막을 내린 날입니다.
구 경영진이 물러나면서 1.8항쟁은 조선대학교가 민립대학으로서 정체성을 회복하게 된 상징적인 날이 됐습니다.
1.8항쟁을 계기로 조선대학교에서는 인권운동의 대부였던 이돈명 변호사가 총장으로 추대됐고
전국 사립대 최초로 예·결산 공고로 ‘투명 행정’을 실현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교직원 및 학생, 동문으로 구성된 학내 최고 협의기구인 ‘대학자치운영협의회’을 꾸려
현재 모든 대학에서 운영 중인 ‘대학평의원회’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생산교육을 실천하는 산학협력
대학의 3대 건학이념 중 핵심이념인 ‘생산교육’의 내실화를 위해서 2004년 산학협력단을 구축하고
산학 연관 협력체제를 통해 차세대 성장동력산업 및 지역특화산업 발전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조선대학교는 사회맞춤형 산학협력 선도전문대학(LINC+) 등 정부에서 지원하는
대부분의 대형 산학 협력 지원 사업을 지속적으로 유치하고 있습니다.
또한 호남 지역 최대의 기술지주회사를 설립하여 지역과 동반 성장하는 선도적인 산학협력 모델을
실현하고 있으며 1,000여 개가 넘는 산학협력 가족회사와 실질적인 교류 협력을 통해 상생 발전을
주도하는 등 지역 산학 협력의 메카로 자리매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