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서울 이태원에서 일어난 압사 사고, 같은 해 12월 광주에 사흘간 최고 40㎝의 눈이 내린 폭설, 지난해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가뭄… 이러한 재난은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일까.우리 사회는 홍수나 지진, 태풍과 같은 자연재해를 비롯해 전쟁과 학살, 각종 대형사고 등의 사회적 재난에 대해 개인, 공동체, 국가 차원에서 대응해 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이태원 참사, 가뭄, 폭설 등 재난의 종류도 다양하다. 이와 같은 재난의 역사는 중국과 일본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김선희 소프라노가 호남예술열전Ⅱ 시간에 ‘정율성과 그의 음악세계’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지난 2019년 5월 ‘동아시아 재난의 기억, 서사, 치유: 재난인문학의 정립’ 이라는 연구 아젠다를 내걸고 출발한 재난인문학연구사업단(단장 강희숙· 이하 재난인문사업단)은 현대사회가 겪고 있는 다양한 재난에 대해 인문학적 반성과 성찰의 기회를 갖고자 여러 가지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렇다면 재난을 인문학적으로 성찰하는 일은 무엇일까? 재난인문사업단은 자연재해와 전쟁, 산업재해 등 예기치 않은 재난 상황에 직면하는 현대사회를 인문학적으로 접근해 연구하는 ‘재난인문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한국과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의 자연적, 사회적 재난에 대해 살펴보고 ‘재난사회’에서의 삶과 연대 가능성을 모색한다.
강희숙 단장
지난 4년간 재난인문사업단을 이끌어 온 강희숙 단장으로부터 지금까지의 성과와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들어봤다.
강 단장은 “지금까지 재난에 대한 접근은 자연과학 또는 사회과학 분야에서만 이루어져 왔다”며 “이러한 가운데 재난인문사업단은 재난을 인문학적으로 바라보고 성찰하면서 ‘재난인문학’이라는 새로운 분야의 학문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가뭄, 폭우 등 흔히 재난이라고 알고 있는 기후위기 등은 인문학으로 접근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었어요. 인문학은 자연을 다루는 자연과학과 대립되는 영역으로서 인간의 가치탐구와 문화 등을 연구했죠. 하지만 재난이 빈번하게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지금은 재난의 역사를 통해 재난의 여지를 감지하고 사유·성찰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그것이 재난인문학의 역할이죠.” 강 단장은 우리의 삶 자체가 이미 재난에 처해있다고 말한다.
지난 2014년 4월 발생한 세월호 참사부터 학동 철거건물붕괴 사고, 화정아이파크 붕괴, 이태원 압사 사고를 비롯해 신종플루, 메르스, 코로나 19, 폭설, 폭염 등을 거쳐오면서 우리는 사건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사유하고 진단하기보다는 결과를 수습하는 데에 급급했다. 재난이 발생한 원인에 대한 성찰이 없었고 재난이 던진 물음들에 대해 깊게 숙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재난이 일상이 된 지금, 재난인문사업단은 지금까지의 재난에서 나아가 자연, 인간, 사회, 국가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다. 특히 광주, 대한민국을 넘어 동아시아, 세계로 시공간적 범위를 확장해 재난을 통해 새로운 사회의 밑그림과 인간학을 다시 설계하는 계기로 삼겠다는 것이다.
강 단장은 “과거와 현재의 재난을 매개로 수평적·수직적으로 재구성되는 관계의 연쇄를 중심으로 동아시아라는 공동성을 다시금 탐구하고자 한다”며 “한국과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의 주요 국가를 대상으로 다양한 시대, 다양한 장소에서 일어난 재난에 대한 역사적·문학적·철학적 분석과 고찰을 통해 인류가 재난과 마주해 온 방식을 시·공간적으로 아카이빙하고 분석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재난에 대응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구체적인 방법들을 탐색하는 동시에 재난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떠한 삶과 연대가 가능할지를 근본적으로 모색하는 것이 임무”라고 강조했다.
‘재난인문학’ 연구는 1단계 ‘재난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 2단계 ‘재난인문학의 정립’으로 나눠 진행중이다. 지난 2019년부터 3년간은 ‘ 기록기억’, ‘정체성’, ‘트라우마 심성’을 주제어로 삼아 1단계 연구를 진행했다. 2단계가 시작된 지난 2022년에는 ‘종교의례’를 주제어로 다양한 연구를 진행했으며 올해는 ‘기술 미디어’, 내년에는 ‘이동 초국경’ 을 끝으로 사업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문화공간 오래된숲에서 진행한 ‘공감과 소통의 인문학 닫힌 마음 열기’
1단계 3년 동안은 재난을 인문학적 관점에서 연구하기 위한 기반을 구축했다면, 2단계 4년 동안은 각 국가와 사회마다 재난에 대처해 왔던 양상과 재난 이후의 변화를 분석한다는 계획이다. 재난인문사업단의 궁극적인 목적은 재난 디지털 아카이브를 세계적인 수준의 동아시아 재난 연구 아카이브로 발전시킴으로써 오늘날 동아시아의 여러 사회가 공유하는 재난 문제를 함께 연구하기 위한 국제 협력의 근거지를 마련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재난의 상호연관관계, 재난과 사회적 변화의 연관성, 재난을 기억하거나 극복하는 방법 등을 연구, 통합적인 재난 연구가 이뤄지는 거점으로 성장시켜 나간다는 것이다.
호남예술열전Ⅲ 방성춘 국악인의 강연
재난인문사업단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들은 출범 첫 해부터 재난인문학 정립을 위한 워크숍과 시민교육프로그램인 재난인문학강좌, 재난인문학 포럼, CSU 기후위기아카데미를 꾸준히 열고 있다. 지난해에는 재난인문학 총서 발간, 재난현장사진 공모전, 기후위기·물 부족 문제 대응 대토론회 등을 진행했다. 특히 총 20권의 재난인문학 총서는 재난인문사업단의 3년간의 연구 성과물로서 재난인문학의 정립이라는 궁극적 목표에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현재 광주·전남지역의 현안인 물 부족 사태를 다룬 대토론회는 지역민의 관심과 전문가들의 의견을 이끌어냈다.
재난인문사업단이 숲사랑물사랑환경대학과함께 진행한 환경 생태 문화 답사
이 중 가장 대중들의 인기를 끌었던 것은 바로 재난인문학강좌이다. 이 프로그램이 주목을 받은 이유는 ‘우크라이나-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코로나19 사태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 ‘영화 「공기살인」 원작자 소재원과 함께하는 인문학 특강’, ‘미술로 읽는 재난’ 등 국가, 문화 등 다양한 관점에서 재난을 바라봤다는 점이다. 강 단장은 이 같은 활동들과 함께 앞으로 재난인문학을 교과목으로 개발, 한국 인문학 연구의 지평을 넓혀 지역사회와 미래세대에게 도움을 주고자 한다. 또 동아시아에 한정하지 않고 전 지구적인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성해 재난인문학의 연구를 지속할 계획이다.
토요인문학강좌 ‘장자에게 인간의 길을 묻다’ 진행 모습
“‘재난인문학’이 재난 속에서 찾으려 하는 인간의 삶과 가치, 인간다움의 의미는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우리 사업단은 이에 대한 답을 지역사회로 확산시키는 한편 인간의 본질이란 무엇인지를 밝혀나갈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