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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재난체험수기 공모전 대상
총관리자
2020-10-28
658
재난체험수기 공모전
조선대학교 재난인문학연구사업단
제1회 재난체험수기 공모전
“코로나19 재난 속 현장의 생생한 경험, 수기로”
조선대학교 재난인문학연구사업단이 ‘코로나19 감염병’이라는
사회적 재난의 경험을 기록하고 공유하기 위해 ‘제1회 재난체험수기 공모전’을 개최했다.
이번 공모전은 일상의 삶을 뒤흔들어 놓은 ‘코로나19’ 사태를 극복하는 방안을 함께 모색하고
재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기록으로 남기려는 취지에서 마련됐다.
7월 13일부터 8월 9일까지 진행된 공모전에는 총 133명이 참여하였다.
참여자들은 지역, 연령뿐만 아니라 국적까지 다양해 눈길을 끌었다.
공모 분야는 코로나 19와 관련한 일상 체험에 관한 에세이(수기, 일기, 편지 등)다.
심사 결과 △대상 우소정 △최우수상 이윤서 등 3명 △우수상 한지혜 등 6명 △장려상 정낙민 10명 등 모두 20명이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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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수상소감
우소정
너무 감사합니다. 화려한 글솜씨를 가지지도, 남들의 주목을 끌 만한 긴장감 있는 주제도 아닌 저의 수기가 대상을 받게 되어 놀란 마음과 감사한 마음이 공존합니다. 감히 저의 수기가 힘든 분들에게 조금의 위로가 될 수 있길 소망합니다. 세상에는 말 잘 하는 사람도 많고, 똑똑한 사람도 많고, 돈이 많은 사람도 많지만 이런 시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위로해 주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서로의 위로자 되어 아픔에 공감해 줄 때 더 강하게 이 시기를 극복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화려한 글솜씨를 가지지도, 남들의 주목을 끌 만한 긴장감 있는 주제도 아닌
저의 수기가 대상을 받게 되어 놀란 마음과 감사한 마음이 공존합니다.
감히 저의 수기가 힘든 분들에게 조금의 위로가 될 수 있길 소망합니다.
세상에는 말 잘 하는 사람도 많고, 똑똑한 사람도 많고, 돈이 많은 사람도 많지만
이런 시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위로해 주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서로의 위로자 되어 아픔에 공감해 줄 때 더 강하게 이 시기를 극복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대상 수상작
우리는 우리에게 닥칠 일들을 예상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게 삶이란 것을 알면서도 막연하게 우리는 오늘과 같은 내일이 있을 거라는 확신에
오늘의 감사함을 안일함으로 대체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제와 같은 오늘은 늘 피로했고, 지겨웠고, 지루하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그런 나를 벌하듯 2020년 2월 20일 금요일 밤 11시에 걸려온 전화 한 통은 나를, 그리고 우리 가족을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캄캄한 터널 속으로 이끌었다.
“우리야?” 그날 밤은 부산 첫 지역 감염이 속보된 순간이었다.
직감은 행복보단 불행에 항상 민감했다.
전 세계적으로 퍼져 가기 시작한 이 알 수 없는 바이러스가 내 집 문 앞을 두드리고 있었다.
설마 하는 마음을 가라앉히기도 전, 교회 언니가 전화가 왔다. 우리 교회인 것 같다고.
아직 명확히 확인된 것은 없었고, 확실한 소식이 들려 오기만을 기다리며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아닐 수도 있다는 일말의 희망으로 버티던 나는 다음날 아침 부산 1번 확진자가 교회에서 나왔으니
전 성도는 자가 격리에 들어가라는 연락을 받고서야 이게 정말 현실이란 것을 깨달았다. (중략)
엄마와 난 외할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약간의 치매가 있으셨던 할머니는 엄마와 나에게 의존적이었고
거동도 불편했기에 엄마와 내가 번갈아가며 할머니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해냈다.
하지만 잠깐 엄마와 내가 일을 나간 사이 방 안 이동 변기에서 넘어져 생긴 대퇴부 골절로 인해
아예 누워서 아무것도 못하게 된 할머니는 어쩔 수 없이 집 바로 앞 요양병원으로 옮겨졌고
그것이 할머니와 우리 가족의 생애 첫 헤어짐이었다.
처음으로 가족과 떨어진 생활을 하게 된 할머니는 엄마와 나에게 더 의존하기 시작했다.
엄마와 나의 일과는 출근하는 시간, 잠 자는 시간을 빼고는 할머니의 병원 생활에 모든 것이 집중되었다.
그런 할머니에게 자가 격리를 알리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할머니에겐 코로나19라는 어려운 이름도, 전염이 되는 바이러스란 것도 중요치 않았다.
할머니에게 코로나는 잔인한 가족과의 단절이었다.
전화 속 할머니는 “우짜노”만 반복했다.
난 할머니가 내 말은 무조건 믿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할머니의 믿음을 빌미로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했다.
“할머니, 두 주만 있으면 나갈 수 있어. 그 때 갈게. 두 주만 참아.”
세상과 단절된 자가 격리였지만 전혀 평화롭지도 조용하지도 않았다.
집단 감염이 발생한 우리 교회를 향해 사람들은 분노에 찬 댓글을 달았다.
그 시기에는 댓글만 보면서 지냈던 것 같다.
한 번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받게 될 것이라고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다 이해 할 수 있었다.
만약 내가 속한 집단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으면 나 또한 그랬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중략)
5월 11일, 할머니 병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지금 빨리 와 달라는 전화였다.
코로나 이후 단 한 번도 면회가 되지 않던 병원에서의 재촉하는 부름은 반가움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면회가 제한된 이후, 병원으로부터 점점 더 자주 전화가 왔었다.
할머니의 신장 수치가 나빠지고 있다든지, 몸이 붓는다든지, 치매 증세가 조금씩 더 진행된다든지 하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아마 딸하고 손녀를 못 봐서 더 빨리 안 좋아지는 것 같다고 했다.
엄마와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잘 부탁드립니다’ 혹은 ‘약 처방에 동의한다’는 것 정도 뿐이었다.
상황이 좋지 않단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이별이 왈칵 코 앞까지 왔는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셨고, 그때가 자가격리 이후 처음으로 할머니를 본 날이었다.
두 주만 있으면 만날 수 있을 거란 기대로 버티던 할머니는 세 달을 더 버티다 먼저 천국으로 갔다.
두 주라는 약속만 내가 하지 않았더라면, 손녀 딸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던 할머니의 사랑을 이용한
내 얄팍한 거짓말만 아니었다면 할머니는 조금 더 엄마와 내 곁에 있을 수 있었을까. (중략)
난 재난 영화의 끝이 늘 사랑과 화해, 연대로 끝나는게 진부했다.
하지만 정작 내가 그 재난 영화에 들어와 주인공이 돼 보니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 화해하며
함께 살아가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다는 것이 피부로 와 닿았다.
“짠!”하고 나타나는 선물같은 해피 엔딩은 없었다.
혼란스러운 가운데 준비했던 시험은 실망스러웠고, 난 여전히 알바를 구하지 못했다.
하지만 희망이 가장 없어 보이는 지금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희망이 믿어진다.
오늘보단 내일이 반드시 나아질 거란 믿음으로 하루를 살아간다.
다시 시작된 일상의 움직임들은 결코 예전처럼 지루하지 않다.
당연한 줄 만 알았던 내 옆의 가족과 친구들이 만들어내는 일상의 모든 순간 순간들은 여느 때보다 새롭고 감사하다.
전쟁같은 우리들의 영화는 아직 상영 중이다. 우리들은 모두 멋진 주인공이며 주인공은 결코 죽지 않는다.
우리는 그렇게 해피 엔딩을 향해 무던히 걸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