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하는 건 힘든 일이다. 그게 약한 존재라면 더더욱. 나에게는 두 마리의 동물이 있다. 모두 길에서 데려온 애들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나는 목포로 봉사활동을 갔다. 동물을 좋아했기 때문에 보람을 느끼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고, 학교에서 지정해 준 봉사활동 장소 중에 유일하게 있는 고양이 보호소가 목포에 있었다. 막상 도착하니 일은 거의 시키지 않았다. 나는 고양이와 놀아주기만 하다가 일찍 보호소를 나왔다. 엄마에게 데리러 오라는 전화를 하고, 갈 곳이 없었던 나는 근처를 구경하기로 마음먹었다. 정처 없이 발을 옮기며 걸은 지 얼마 안 돼서 웬 고깃집 근처에 다다랐다. 그런데 가게 근처에 놓여있는 벤치 아래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자세히 다가가 보니 개였다. 점박이 색깔의 성견은 몹시 더웠는지 혀를 쭉 빼고 헥헥댔다. 내가 가까이 다가와서 쳐다보는데도 경계하지 않았다. 바로 옆엔 금빛 털을 가진 강아지 한 마리가 더 있었다. 마찬가지로 배를 땅바닥에 대고 완전히 엎드려서 미동도 없을 뿐, 경계하지 않았다.
때는 8월 중순이었고, 근처는 아스팔트 도로뿐이었기 때문에 날은 무척 더웠다. 도로에서는 아지랑이가 올라왔고, 보호소에서 준 아이스크림은 이미 물처럼 녹아 플라스틱 튜브 안에 담겨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점박이 개를 만져보았다. 달궈진 돌덩이를 만지는 것처럼 뜨거웠다. 점박이 개는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시선이 향하는 곳을 보니 고깃집 입구였다. 그러고 보니 목줄도, 리드줄도 달려있다. 아마 식사를 하러 들어간 주인을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나는 이 폭염에 개를 두고 홀로 시원한 곳에 들어간 주인을 약간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면서 옆의 금빛 강아지를 안아 올렸다. 안아 올려서 보니 이미 젖은 뗀 것 같았다. 이미 녹은 아이스크림 튜브를 더위를 식혀주기 위해 배에 댔는데, 더위에 탈진해서 그런 건지 안아 올릴 때부터 통 반응이 없었다.
그러다가 아저씨 한 명이 가게 밖으로 나왔고, 나에게 강아지를 데려갈 것이냐고 물었다. 들어보니 점박이 개가 어미인데, 출산한 강아지 중 유일하게 이 녀석만 아무도 데려가지 않았단다. 데려가고 싶으면 주겠다고 하셨다. 앞서 말했지만, 난 동물을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개, 고양이를 특히 더. 그러므로 당연히 옳다구나! 하고 제안을 받아들였다. 나를 데리러 온 엄마는 키우게 해달라는 내 요구에 난처한 듯 고민하다가 결국 ok 사인을 날렸다. 나는 그대로 강아지를 데리고 차에 탔다. 그 전에 아저씨는 자기의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키우기 힘들면 다시 연락해 달라고 했다. 땡볕에 개를 내버려둔 걸 보고 내심 원망하는 마음이 들었는데, 걱정하는 걸 보니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차 안에서 가족들에게 개를 키울 거라는 통보 비슷한 전화를 했다. 당시 모든 가족이 개 양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고 얘기를 했기 때문에, 나는 이 모든 책임을 혼자서 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러나 이후 목욕, 산책, 밥 주기, 병원 데려가기를 비롯한 모든 양육은 대부분 나 혼자서 하게 되었다. 그나마 작은 언니가 가장 많이 도와줬지만, 여전히 벅찼다. 아직 어려서 엄마랑 떨어지고 나서도 슬픈 내색도 없이 차 안에서 잠만 자던 강아지는 금세 기운을 차려 사고를 치기 시작했다. 자연히 그전까지 방구석에 박혀서 핸드폰이나 보던 내 일상은 많이 달라졌다. 매일 최소 한 번 이상 산책을 나갔고, 밥을 먹이고 밥그릇을 설거지했고, 똥을 치우고 병원에 데려갔다. 그러다가 같은 해에 고양이 한 마리를 만났다. 눈이 휘몰아치던 겨울날에 다녔던 중학교 덤불 앞에서 튀어나온 검은 고양이를. 비쩍 마른 고양이가 내 팔에 얼굴을 비비며 무릎 위에 올라온 순간, 집에 데려오겠다는 충동이 천둥이 번쩍이듯 나를 다시 내리찍었다. 그렇게 나는 무언가에 쫓긴 것처럼 또 동물을 집에 데려왔다. 전과는 달리 허락도 맡지 않고 충동적으로 데려온 고양이었기 때문에 고양이는 온전히 내 고양이가 되었다. 부모님은 동물을 키우는 데 필요한 돈을 거의 주지 않으셨다. 나는 대부분의 비용을 내 용돈과 작은 언니의 도움으로 해결했다.
그렇게 기르면서 차차 깨달았던 것 같다. 동물을 키우는 데 필요한 돈과 노력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것인지를 말이다. 그 전의 나는 동물을 내게 옴으로써 행복을 가져다주는 어떤 매개체 정도로 생각했다. 한 마디로 동물을 동물 그대로 바라보지 않았다. 미디어에 나오는 꾸며진 어린 동물들의 모습을 보면 늙고 병들고 사고 치는 모습은 잘 상상되지 않는다. 그냥 힘들 때 애교를 부리고 위로해 주는 모습만 보이기 마련이고, 사람들도 그런 모습만 보고 싶어 한다. 그러나 동물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무거운 가치를 가진 생명이다. 항상 건강하고 귀여운 모습만을 보여주지 않는다. 동물은 삶의 모든 것을 제어한다. 내가 주로 책임져야 하는 동물이 있으면 여행도, 직장 선택도, 이사도 쉽지 않다. 무엇보다 항상 돌봄 노동에 시달려야 한다. 학교나 일이 끝나고 자신에게 쓸 시간을 나눠서 동물에게 써야 한다는 뜻이다. 지쳐도 똥을 치우고, 밥을 주고 물을 갈아야 한다. 그렇게 다 한다고 해도 늘 죄책감에 시달린다. 동물이 아프면 내 탓인 것 같고, 갑자기 사고를 당해도 내 탓인 것 같은, 내가 부족한 보호자인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또 내가 동물을 기르면서 괴로운 것 중의 하나는 동물을 너무 사랑하게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너무 사랑하게 되어버린 나머지 동물이 나오는 콘텐츠도 보지 못하게 되었다. 조회수를 얻기 위해서 동물에게 이상한 음식을 먹이는 영상이나, 지나친 개량으로 턱이 짧아져 혀가 들어가지 않는 말티즈를 보고 귀엽다고 하는 댓글, 스트레스를 주는 방식으로 동물을 양육하는 모든 콘텐츠가 더 이상 즐겁거나 재밌지 않다. 그전에는 귀엽다며 웃어넘겼을 미디어에 점점 불편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길거리에서 아픈 고양이나 학대당한 동물 얘기를 보면 우리 집에 있는 애들 생각에 우울하다.
이렇듯 동물을 키운다는 건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괴롭고, 힘든 일에 가깝다. 그러므로 동물을 키우기로 할 때에는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한다. 동물이 안겨주는 따스함보다는, 겪게 될 괴로움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내가 신중하지 않았기에 더욱더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에게 돈이 없고, 쏟을 노력이 없다면 동물을 키워서는 안 된다고. 내 개와 고양이는 내게 넘치는 사랑을 주었지만, 그 사랑의 무게에 대해서도 가르쳐 주었다.